■ 임철(33)중국 베이징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임씨의 부모는 1993년부터 한국을 오가며 자식을 뒷바라지 했다. 부모는 중국 최고 명문대를 졸업한 아들이 중국에서 취업하기를 바랐지만, 임씨는 일본 유학을 택했다. 와세다대학에서 중국 정치 전공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홋카이도대학에서 2년간 연구원으로 일했고, 2009년 여름부터 1년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교환연구원으로 있었다.
조선족학교에서 한중일 3개국어를 배웠다는 것은 큰 강점이지만,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어지간한 노력 없이는 3개 국어 모두 본토사람만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씨는 베이징대에 입학해 난생 처음으로 조선족이 아닌 중국인 학생들과 경쟁했다. 자신의 중국어가 부족함을 느꼈다. 읽기와 쓰기가 특히 힘에 부쳤다. 일본 유학을 시작할 때에는 일본어가 문제였다.
조선족이 한국어·중국어·일본어를 주로 구사하는 것은 또다른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게 임씨의 생각이다. “영어를 배우지 않기 때문에 조선족들의 시야가 동아시아에 갇히는 경향이 있어요. 젊은 조선족들이 보다 넓은 세계에 눈을 떠야죠.” 임씨는 적당한 자리를 구하면 어느 나라든 가서 일할 생각이다. 아직은 중국 대학교수 임금이 너무 낮고 자유로운 학문연구에도 제약이 있어 망설여지지만, 나중에는 중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 그는 내년 3월 일본에서 만난 중국인 여성과 결혼할 계획이다. 결혼식은 부모가 있는 서울에서 치를 예정이다.
■ 최영국(33)
고중(고등학교)시절
공부를 잘 하는 편이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이 베이징 등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때 최씨는 고향과 가까운 길림성의 길림화공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일본에서 취업하겠다고 일자리를 알아보는 친구가 있었다. 최씨도 친구따라 강남에 갔다. 함께 일본 기업을 알아봤다. 중국기업보다 한국기업, 한국기업보다 일본기업의 임금이 더 높았다.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한지 석 달 만에 일본 정보통신기업에 취업했다.
2년 동안 일본 기업의 중국 다롄 지사에서 일하고 2003년 일본 도쿄의 본사로 옮겨왔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조선족 여성과 결혼했고, 2009년 딸을 낳았다. 최씨의 아이폰 바탕화면에 딸의 사진이 들어있다. 약 500만엔의 연봉을 알뜰하게 모아, 지난 3월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에 있는 3500만엔짜리 만숀을 구입했다. 최씨는 “워낙 없는 집이라 부모님께 손 벌릴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최씨의 부모는 줄곧 고향 서란에서 농사를 짓다 3년 전 한국에 나가 일을 시작했다. 두 살 위 형은 한국 대기업 중국법인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 최인원(33)
7살 때 아버지를 골수암으로 잃었다. 어머니는 홀로 최씨 남매를 키웠다. 최씨가 초중(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는 돈을 벌러 한국으로 떠났다. 최씨와 여동생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최씨는 서란조선족제일중학교에서 공부를 가장 잘 했다. 6년 내내 빠지지 않고 반장을 맡았다. 북경교통대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국비유학생으로 일본 요코하마
국립대학에서
국제경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최씨는 계속 박사과정을 밟을지, 베이징의 일본기업에 취업할지 고민했다. 일본 회사의 임원이 최씨의 지도교수에게 중국인 학생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고, 지도교수는 최씨를 추천했다. 2005년 최씨는 일본의 플라스틱 생활용품 제조업체에 취업했다. 회사 매출의 절반이 수출에서 이뤄졌고, 수출의 절반이 중국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본사직원 600명 가운데 중국인은 최씨가 유일하다. 최씨는 입사 5년만에 계장으로 승진했다. 입사동기 중 가장 빠른 승진이었다. 보통 계장이 되기까지 10년이 걸린다.
최씨가 취업을 고민할 때 한국은 후보에도 들지 않았다. 친구들 중에도 한국에서 취업하겠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일본은 중국에 진출한 기업이 워낙 많아 조선족에게 열려있다. 한창 발전하고 있는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기회가 많은 나라이다. 한국은 매력이 없다. 최씨는 “우리 부모님들이 한국에서 너무 힘들게 일하고 괄시받아서 가고싶은 생각이 없다. 조선족들이 너무 힘들게 사는 것 같아서 잠깐씩 방문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최씨는 2009년 일본에서 일하는 조선족 아내를 맞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서울 마포의 한 아파트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데려온다. 여동생은 한국 대기업의 베이징 지사에 취업했다. 세 식구는 매년 설과 추석 때 서울에서 모인다.
■ 김홍녀(32)
연변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난징의 한국 대기업에 취업했다 그만두고 일본 히로시마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유학을 마치고 일본의 무역 회사 두세 곳을 옮겨다녔다. 최근 인테리어 자재를 수출하는 무역회사에 취업했다. 회사는 본격적인 중국진출을 앞두고 김씨를 채용했다. 중국시장 개척의 중책이 맡겨졌다.
김씨는 요즘 친구들에게 신랑감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국적은 상관없지만 기왕이면 일본에서 살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 대지진 이후 중국으로 돌아간 조선족 친구들도 많지만, 중국에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쉽게 엄두가 나지 않는다.
■ 서영(28)
중국 심양에서 태어났다. 여덟살 때 부모는 한국으로 돈 벌러 떠났다. 심양조선족제일중학교를 졸업하고 심양공과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과 동기생 60여명 가운데 조선족은 서씨가 유일했다. 성적은 중하위권이었지만 취업은 가장 빨랐다. 중국에
공장을 둔 일본 반도체 회사의 공장장 비서 자리였다.
2007년 10월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 요코하마의 카나가와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부모는 한국의 공사현장과 식당에서 일해 모은 돈으로 1년치 등록금과 생활비 7만위안을 마련해줬다. 부모에게 더이상 손 벌리기 미안해서 틈틈이 돈을 벌었다. 야끼니꾸집, 이자카야, 비디오대여점, 호텔, 훼밀리레스토랑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지금은 중국어나 한국어를 일본어로 통역하는 시급 1천엔짜리 전화 아르바이트를 하고있다. 지난 여름방학엔 한 달동안 200시간을 통역했다.
서씨는 내년 3월이면 석사학위를 받는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예전엔 조선족 유학생들 대부분 일본에서 취업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 경제의 하강과 올초 대지진으로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서씨는 “중국이 워낙 빠르게 발전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머뭇거리다 뒤쳐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결혼을 생각할 나이도 됐다. 한국인 남편은 싫다. 서씨는 “시댁에서 반대하는 결혼은 하고싶지 않다”고 말했다. 조선족 남편도 그닥 내키지 않는다. 서씨 생각에 조선족 남자들은 술마시고 노래하고 노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기왕이면 자상한 한족 남편을 만나고 싶다. 요즘 중국 여성들 사이에선 ‘상해 남자’가 대세다. ‘상해 남자’는 여자친구의 핸드백도 들어주고 요리도 잘 한단다. 하지만 부모가 한족 사위를 선뜻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 서씨의 오빠도 부모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오래 사귄 한족 여자와 헤어졌다. 서씨의 부모와 오빠는 모두 한국에서 살고 있다.